의료 AI 규제가 영국에서 방향을 바꿨다. 2026년 10월 6일 영국 정부는 의료 AI 규제 국가위원회의 권고 44개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확인하고, 영국 전역에서의 이행 방안을 제시했다. 이 위원회는 의약품·의료제품규제청(MHRA)이 2025년 9월에 설치한 기구로 임상의와 규제 전문가가 중심이며, 권고 보고서는 2026년 9월 10일 발표됐다. 이번 정부 답변의 핵심은 분명하다. AI가 탑재된 의료기기는 시장에 나가기 전에 한 번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전 기간에 걸쳐 평가와 모니터링을 이어 가며 실제 성능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시 전 한 번의 평가로 끝나지 않는다
위원회가 짚은 약점은 구체적이다. 현행 의료기기 규정이 만들어질 때만 해도 AI 제품은 배포된 뒤에도 계속 학습하고 업데이트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승인 시점의 성능만으로는 1년 뒤, 다른 환자군에서, 여러 차례 업데이트를 거친 뒤에도 여전히 안전하고 효과적인지를 알 수 없다. 정부가 수용한 개혁 방향은 위험에 비례하는 전주기 규제다. 출시 전 증거 요건과 출시 후 보증의 비중을 다시 맞추고, 출시 후 감시를 수동적인 이상 사례 보고에서 품질 신호, 성능 변화, 안전 문제를 지속적으로 살피는 방식으로 바꾼다. 정부는 또 환자 참여 강화, 진료에 AI가 쓰일 때 환자에게 알리는 것,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했을 때의 이의 제기와 구제 경로 명확화, 서비스가 닿지 않는 계층을 포함한 혜택의 공평한 공유도 약속했다.
유럽 대륙의 흐름과 통하는 면도 있다. EU AI 법은 위험 기반 집행이 실무 단계에 들어섰고 의료 시스템 역시 고위험 쪽에 놓여 있다. 다만 영국은 자국의 의료기기 틀을 현대화하는 길을 가는 것이고, 세부 내용은 MHRA의 후속 지침과 협의를 통해 정해지므로 EU의 일정을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세 가지 날짜는 이미 정해졌고, 샌드박스가 먼저 움직인다
답변과 같은 날 MHRA는 AI 의료기기 규제 샌드박스인 AI Airlock 3기 신청을 열었다. 이번 기수의 주제는 출시 후 감시와 전주기 규제로, 선정된 개발자는 규제 당국, 의료기관과 함께 실제 제품으로 배포 뒤 안전하게 모니터링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시험한다. 신청자 설명회는 2026년 10월 22일 열리고, 첫 선정 결과는 2026년 11월에 나오며, 이 프로그램에는 3년분의 정부 재원이 추가로 확보됐다.
기업이 자료 준비 시점을 가늠할 날짜는 두 개 더 있다. MHRA는 2026년 12월까지 AI 의료기기가 적응하고 개선되는 과정에서 변경을 어떻게 관리할지를 다룬 지침 초안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즉 업데이트가 어느 수준에 이르면 새로운 설명이나 재평가가 필요한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2027년에는 AI 의료기기의 해당 여부와 분류 방식을 정하는 협의가 시작되는데, 이는 위원회의 첫 번째 권고다. 44개 권고 전체를 아우르는 완전한 이행 로드맵은 일정과 책임 주체를 담아 2027년 봄에 발표되며, 새로 설치된 프로그램 보드가 추진을 맡는다.
누가 적용 범위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가
적용 범위부터 분명히 하자. 이 방안의 대상은 영국에서 AI 의료기기를 공급하는 개발자와 제조사, 그리고 NHS를 비롯한 영국 의료 체계 안에서 이를 도입하는 기관과 임상의다. 의료 AI 제품 중 일부는 영국 2002년 의료기기 규정의 적용을 받고, 다른 일부는 데이터 보호, 전문직, 조직 거버넌스 규정을 따르므로 둘을 섞어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일반 건강 앱, 행정용 AI, 의료 목적이 없는 범용 모델이 이번 답변 때문에 자동으로 MHRA 관할 의료기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는 영국 한 나라의 방안이지 전 세계 공통 규칙이 아니므로, 다른 시장에 판매하려면 그 시장의 규정을 따라야 한다.
권고 수용은 새 법 시행이 아니다
가장 오해하기 쉬운 지점은 10월 6일을 새 규정 시행일로 여기는 것이다. 권고 수용은 방향과 일정만 확정한 것이다. 해당 기준, 분류 방식, 단계적 승인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될지는 2026년 12월 지침 초안, 2027년 협의, 이후의 법 개정을 기다려야 한다. 단계적 승인 자체도 아직 검토 중인 경로로, 유망한 도구를 엄격한 감독 아래 NHS에서 더 일찍 쓰면서 실제 현장 증거를 쌓는다는 뜻이지 승인 문턱을 낮춘다는 뜻이 아니다.
영국 시장 진입을 준비하는 제조사라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분명하다. 출시 전 자료 한 묶음만 준비할 것이 아니라, 버전 변경 기록, 출시 후 성능 모니터링, 안전 신호 대응 절차, 환자 고지 절차까지 전주기 증거 체계를 미리 갖춰야 한다. 한 번의 승인만 염두에 둔 팀은 제품의 첫 대규모 업데이트 때 위험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변경을 보고해야 하는지, 성능 저하를 누가 발견하는지, 문제가 생기면 환자는 누구에게 호소하는지, 새 틀에서는 이런 질문이 반드시 따라붙는다. 2027년 봄 로드맵이 나온 뒤에야 준비를 시작하면 이미 한발 늦는다.